민현이 나간 이후로 재환은 제대로 엎드리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로 멍하니 있어야만 했다.
차갑고 건조한 공기 속에 스스로가 겉도는 것 같아 어지러웠다.


하나 둘 등교하는 반 아이들에게 어색하니 웃으며 인사하던 재환이 어느새 1교시가 시작할 시간이 되자 일어났다.
그때까지 교실에 돌아오지 않는 민현의 행방이 궁금했지만 꾹 참고 보건실로 향했다.
그러다 계단 옆 창밖으로 보이는 벤치에 민현과 제 소꿉친구 우진이 앉아있는 것을 보곤 걸음을 멈췄다.
자꾸 그와는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진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제게 그리도 다정한 말을 건네던 민현이었는데, 지금은 우진과 뭐가 좋다고 웃음을 그치질 못하는 걸까.
잠시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서있다가 걸음을 재촉했다. 이런 감정은 망가진 몸이건 정신이건 더 약하게 만들 뿐이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이번에는 다행히 계셨던 보건선생님이 재환을 맞아주셨다.
열을 재는 동안 제껴진 커튼 사이로 환하게 들어오는 햇빛에 눈길이 간다.
그 강렬한 빛에 부신 눈을 가늘게 뜬 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시리다며 징징대는 눈을 달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다루지 못하는 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삐- 하고 수치로 환산된 재환의 혼란감을 보건선생님께서 친히 읊어주셨다.

"39.1도. 열이 높네."

아, 그렇구나.

병원 안갔니? 네. 약먹고 좀 누워있을래? 못 견디겠으면 병원 가고. ...그냥 누워있을게요.


재환은 약을 한 손에 들고 정수기에서 미지근한 물을 컵에 따랐다.
1교시에 수업이 있으시다며 나가시는 선생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는 보건실 한쪽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갔다.
가지런히 놓인 두 침대 중 하나에 걸터앉아 한번에 알약을 삼키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으, 혀에 잘못 닿았어.
입안에서 씁쓸하게 퍼지는 약의 맛이 익숙하게 꺼려졌다.
재환이 고요한 주변을 슥 둘러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어쩌지.


머리며 눈, 온 몸이 무겁고 따가웠다. 왜이렇게 팔이 따끔한건가 했더니 높이 오른 열때문이었나보다.
39.1도면 완전 높은 거 아닌가...
직접 들으니 괜히 더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열이 많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실내화를 벗고 푹신한 이불 속으로 조심스레 몸을 묻었다.
온도를 올린 전기장판이 아직 데워지지 않아 침대며 이불이 차갑다.
덩그러니 놓여진 몸에 닿는 한기가 정신을 일깨워주겠다는 듯이 저를 찔러댄다.
아파, 정말. 이렇게 또 아플 수 있을까.
아까는 항상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은 또 이런 경험 다시는 하고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니.
작게 하는 하품에도 머리가 아파왔다. 절로 고인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고 목을 움츠렸다.

아프다는 생각만 하니 더 그런 것 같아 다른 생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자, 무슨 생각을 해볼까? 이 망할 전기장판이 언제쯤 따뜻해질까?

흐,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눈 앞이 뿌연 걸 보니 너무 웃어 눈물이 나온다 싶었다.

아니야. 난 방금 웃기 시작했는데.

음, 그럼 너무 울어 웃음이 나오나보다.


바보가 되어버린 머릿속이 혼자 맹렬히 떠들기 시작했다. 왜, 그 애 생각은 안해?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제 딴에는 기분을 좋게 해준답시고 저러는 것 같은데, 저는 그 애를 잊어버렸는걸.

하지만 이미 심장은 그에 맞춰 쿵쿵 뛰어대고 있었다.

제 눈에 꼭 맞춰 전하던 일말의 감정, 다수의 염려, 그리고 약간의... 그건 뭔지 모르겠다.

어느샌가 쥐고있던 손을 펴 다시 하나씩 접었다.

네가 하라는 대로 보건실도 가고, 약도 먹고, 따뜻하게 있어.

입술을 깨물며 또 다시 하나씩 편다.

근데 네가 하라는 대로 널 못 잊겠고, 시간도 못 갖겠고, 거리도 못 두겠어.


나 어쩌지.


기가 막히게도 끝까지 저는 네 생각만, 내 생각만 하는 사람이었다.

이기적인 저때문에 그가 그만두자 했을 수도 있는데. 물론 그는 부담스럽다고 했던 것 같지만.

이렇게 아플 때만큼은 함께 있어주던 사람이었기에 마냥 시린 손이 더욱 허전했다.



"... 싫어."



약빨 참 안 받는다.

전기장판은 슬슬 열이 올라와 뜨뜻해지는데 왜 제 머리도 여전히 뜨거운건지 모르겠다.

약해진 몸과 더불어 북받히는 감정때문에 눈물샘에 구멍이라도 나버린 듯 마구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예 엎드린 채로 엎드려 베개에 고개를 묻고 엉엉 울어대는데 누군가 급하게 제 이름을 불렀다.



"야, 김재환, 괜찮아?"

"흐, 으, 뭐야..."

"왜 우냐, 많이 아파?"



박우진? 여긴 어떻게 알고...

재빨리 눈물을 닦으며 일어나 앉는데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아 잠시 눈을 감고 휘청였다.

히익-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붙잡는 우진에게 기대듯 균형을 잡고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 왜 왔어."

"황민현이 너 아프다고 가보라더만. 진짜 많이 아픈 가보다..."

"이렇게 아픈 거 처음이야... 너 옮겠다."

"어, 이득이지 그럼. 나도 좀 보건실에서 누워있어보자."



아픈 게 좋은 줄 아냐.

그보다 황민현이 제게 가보라 말했다는 것에 더 신경이 쓰였다.

괜히 머리가 더 아파지는 것 같아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 수업시간일텐데.



"수업은?"

"민현이가 말해놓겠대. 나 여기 있을라고."

"...가라 그냥."



아 싫어어, 너 간호할거야. 뭔 간호야 니가...


박우진때문에 못 산다 진짜.

우진의 성화에 못이겨 푹신한 이불을 턱끝까지 덮고 불퉁한 눈초리를 보냈다.

눈을 마주치자 씨익 개구지게 웃어오는 게 무언가랑 겹쳐보여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못됐어...


제가 잘 듯이 눈을 꾹 감자 나란히 놓인 침대에 우진도 다이빙하듯 몸을 던졌다. 으, 피곤해.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며 수업에 대해 혼자 계속 투덜대던 우진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드는 게 느껴져 살짝 옆을 쳐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감은 두 눈이 참 얌전했다.

간호한다더니 그냥 자려고 왔구만? 하고 나지막히 중얼거린 말에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답을 해왔다. 나 안자거든...

헉 하는 기분에 왜 자는 척해, 투정부리곤 우진을 등지고 벽쪽을 향해 누웠다. 쟤때문에 잠도 안 와.



"재환아."

"뭐야... 낯간지럽게."

"힘드냐."



재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우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안다. 제대로 걸려버린 감기때문에 열에 들떠 헤롱대는 저를 보고 한 말이겠지.

그리고 저는 마찬가지로 무언가때문에 잔뜩 헤롱대는 중이다. 그 막막한 이중성에 절로 눈가가 달아올랐다.

괜히 아무것도 모를 우진이 미워졌다. 왜, 헤집어.



"응."

"많이?"

"많이."

"언제쯤 괜찮아지냐."



몰라... 

저도 모르게 흐려진 말끄트머리에 코끝을 문지르는데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는지 침대스프링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재환의 얼굴 위로 하얀 티슈 몇장이 툭 떨어진다. 울면 눈 붓는다, 물만두.

...내가 왜 물만두야, 하면서도 야무지게 눈주변을 닦아냈다.

인생 모른다니까, 살다살다 박우진한테 위로도 받고.



"아 따가... 너 때문이잖아 박우진."

"내가 울렸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우진이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재환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방문을 잡았다.

나 있으면 못 잘것같으니까 좀 자라.

그 말에 재환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눈을 감는다.

문을 열던 우진이 아프지 좀 마, 몸이든 마음이든 건강해야지않겠냐... 하는 것까지 듣고 재환은 정말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마치 몸이 더이상은 무리라며 딱 제한을 걸어버린 것처럼.





재환이 정신을 차린건 1교시 후 쉬는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종이 쳤을 때였다.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베개가 축축해 얼굴을 찡그린 채 눈을 떴다.

내쉬는 숨이며 이마가 뜨거워 흠칫 놀란 재환이 물이라도 마셔야겠다며 문을 열자 보건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 보건실을 나서는 게 보였다.

좀 어떠니? 하고 물어오는 보건 선생님께 잘 모르겠어요... 하는 힘없는 웃음을 지어드리곤 떨리는 손길로 물을 따라 마셨다.


수업... 무리겠지?

땡땡이는 싫은데, 아픈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아 모르겠다...


여기에 더 있어야하나, 생각하는데 누군가 보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더니 저를 보고 어? 한다.



"뭐야, 일어났네."

"뭐야... 넌 왜 또 왔어."



상습범이네 이거. 걱정돼서 그러지...응. 걱정은...

머리를 긁적이는 우진에게 타박어린 말을 안기곤 조심스레 물었다. 그... 별 말 없어?



"무슨말?"

"아니, 나 수업 안들어갔는데..."

"아, 담임이 너무 심하게 아프면 조퇴하래. 하는 게 나을 듯."

"아항..."

"그리고... 아, 아니다. 야, 갈거면 빨리가."

"갈지 안갈지 안 정했거든? 아 그래 간다, 가..."



괜히 심통이 나 입을 쭉 내밀고 투덜거렸더니 우진이 도끼눈을 뜨고 째려본다.

지레 쫄아버린 재환은 얌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보건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곤 우진과 복도로 나섰다.


적막하다.

멍하니 재환이 내뱉은 말에 우진은 고개를 주억거려 긍정했다. 그러게.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재환은 입술을 깨물다 말했다. 나 한번만 더 해볼까.

그러면 우진은 저 멀리 앞을 바라보다 말한다. 그래.

재환의 늘어진 손이 제 바짓자락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오늘만이야.

우진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 그래.

그리고 문이 열렸다.


당당하게 수업시간 중에 뒷문을 끼익 하고 열어버린 우진과 재환에게 온통 시선이 쏠렸다.

곧 창백해진 재환의 얼굴에 다들 웅성대는데 우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재환의 가방을 들고 가자, 손짓했다.

재환은 애써 민현 쪽은 쳐다보지 않고 어색한 웃음으로 끊겨버린 화학수업에 애도를 표하며 문을 닫았다.

이거 너무 관종같았는데... 

팔 떨어진다며 엄살을 피우는 우진에게서 제 가방을 받아들고는 물었다.



"안 들어가?"

"너 집 좀 보내고."



엄마인줄...

대충 한쪽어깨에 가방을 걸치곤 손을 좌우로 흔들어 인사했다. 잘 있어! 부럽다. 병원가는건데 뭘.

그래도. 씩 웃은 우진이 다시 교실 문을 여는 걸 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 시간대에 학교를 나가본 적이 있어야지... 여러모로 기분이 이상하다.






"아...등 따가워..."



재환이 링거를 꽂지 않은 팔을 뒤로 뻗어 등을 슥슥 문질렀다. 엄마두 참... 아무리 그래도 환잔데.

기어갔는지 날아갔는지도 모르게 도착한 집에서 엄마아, 하고 부르자 한창 보시던 드라마를 팽개치시고 다 죽어가는 제게 등짝스매싱을 날리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핸드폰화면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한창 수업중이겠다.

뒤척이자 따라 움직이는 링거줄에 움직이길 포기하고 가만히 제 발끝을 쳐다봤다.


우진이한테 오늘만 한다 그랬다.

바보같은 박우진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것이다. 제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겠다는 건지.


아무리 다른 어떤 것에 신경을 쓰려해봐도 아까 마주친 민현이 가장 신경쓰인다.

재환이 코끝을 찡긋했다.


그러니까 오늘만 하는거야. 오늘 김재환은 평소랑 다르니까 좀 아프다는 핑계로 할말 못할말 다 해봐야지 그냥.


혼자 몇시간째 다짐어린 결심을 하고서 다시 핸드폰을 들어 연락처를 찾는다.

그래도 박우진한테 살아있다구 말은 해줘야겠지? 우진이한테 문자하나.

그리고... 대망의 황민현.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그건 아니다. 사실 너무 잘 안다. 정말정말 하고싶은 말이 많아서,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어.


바싹 말라오는 입술을 축이며 한자 한자 써내려간다. 끝에는 고치고 자시고 할 정신도 없어서 아무말이나 쓴 것 같지만, 저는 오늘 아프니까.

잘자, 로 마무리하고 보내기를 눌렀다.

이렇게 쉽게 끝날 일인데 왜 그동안은... 그래, 연락하긴 했었지. 다 제가 먼저였지만서도.

습관처럼 입을 삐죽 내민 재환이 한문장을 덧붙였다. 이제 내가 먼저 연락 안 할거야.

핸드폰을 옆에 내려놔서야 뭔가 정신이 든다.


으, 이거 완전 연락해달라고 투정부리는 애잖아.


답장이 안 오면 어떡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와도 매한가지구...

정말 만약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면 어쩌지?

그렇다면 마침내 기분 좋은 꿈을 꿀 수 있을텐데. 따뜻한 봄바람 아래, 흩날리는 벚꽃잎 사이에서.


하지만 아직 봄바람은 차갑고, 나무는 앙상하기에 저는 일단 눈을 감기로 마음먹었다.

근데, 이 어두운 가운데서 빛이 반짝인 것 같다면 착각일까?





봄바람 w.해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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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엔딩입니다:3 외전은 내일... 올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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