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현은 하늘이 참 야속했다.



- - - - -



다음날 아침부터 주사를 맞네 붕대를 가네 약을 먹네 하며 이리저리 치이던 재환은 점심무렵에서야 조금 마음 놓을 수 있었다.
웃음기어린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민현에게 재환이 지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와...입원 장난 아닌데요?"
"당연하지. 멀쩡하던 애가 휴지조각이 돼서 왔는데."
"휴지조각은 좀..."


울상을 한 채 투덜거리는 재환을 가볍게 무시하며 읽던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1박2일이라 했지만 원체 세심한 성격의 그였기에 답사용 가방에는 이것저것 다 들어 있었더랬다.
재환의 입원기간동안 해외에 계신 부모님 대신에 같이 있어주기로 한 민현은 그덕분에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민현이 하는 양을 멍하니보던 재환이 뭘 물어보려던 순간 똑똑 하는 노크소리와 함께 담당 의사가 들어왔다.

뭐야, 저 또 뭐 맞아야 돼요? 하며 펄쩍 뛰는 재환에 뒤따라 들어오던 간호사들이 쿡쿡 웃었다.

경계어린 눈빛을 하는 재환을 보며 의사가 헛기침을 했다. 큼, 오늘 더 맞으실 건 없습니다. 아하...
네, 김재환씨...어디보자. 다른데는 금방 아물거고. 다리도 후유증은 이대로라면 없을 것 같네요. 치료 잘 받으시면 무리하지 않는 이상 살짝 뛰는 것도 문제없을 거에요. 아시죠, 제가 말하는 건 마라톤 같은 게 아니고 조깅이라던지. 네, 조깅 같은거...예예.
재환이 히익...마라톤에 취미없어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불편한 데 있으세요? 없어요... 혹시라도 문제 있으시면 바로 버튼눌러서, 불러주시고...

그럼 쉬시라며 문을 닫고 나간 의사와 간호사들을 끝까지 바라보다 재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만 다행이다."
"그러니까."
"그래도 다리 다친게 어디에요, 목 다쳤어봐... 어휴. 그리고 내가 아이돌이었어봐, 얼마나 괴롭겠어. 그쵸?"
"참나... 그 입이 제일 멀쩡한가본데."


민현의 어이없다는 반응에 재환은 무적의 입 아니겠습니까, 하며 낄낄댔다.


너무 밝은 거 아닌가몰라...


재환이 고개를 살살 저어대는 민현에게 흥 하는 코웃음을 치다가 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형 그러고보니 저 다친건 어떻게 알고 왔어요?"

"너 통화기록 중에 내가 제일 최근이라 나한테 전화했나봐."

"아 그르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재환이 다시 물어왔다.



"그러면 그 답사는요?"

"뭐...같이 가야했던 사람한테 맡겼지..."



책으로 향해있던 민현의 눈동자가 멈추었다.

아무렇지 않다며 저를 다독이고는 페이지를 넘겼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태풍 부는데 그냥 그분도 가지말지. 혹시 그분...형 상사 아니에요?"



황민현씨 내일부터 회사 나오지 마세요! 하는 거 아냐?

재환의 실실 웃던 표정은 이어 나지막히 내뱉어진 민현의 말에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유선호였어."



...뭐?


인형마냥 눈만 깜빡이던 재환이 이내 급히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아, 아파. 어, 재환아 조심해.

민현이 어디가 아픈지 인상을 찡그리는 재환을 부축하려 다가갔지만 맹렬히 내젓는 팔에 어쩡쩡하게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아, 그러니까... 뭐야. 유선호랑 지금 며칠 여행가는 거 짼 거 아니야?!"

"1박 2일이고 여행이 아니라 답사..."

"조용히 좀 해봐요! 와 말도 안돼. 당연히 갔어야지! 절호의 찬스 아니었냐고!!"

"찬스는 무슨 찬스...그리고 너 교통사고 나서 실려왔다는데 못 가지 그럼..."



자신이 더 화가 난 듯 손부채질까지 해 가며 열을 내는 재환 때문에 민현은 진땀을 흘려야 했다. 진정해, 일단.



"뭘 진정해요, 진정하긴. 그, 꼬맹이를 지금 혼자 뺑뺑 돌렸다는 거 아냐."

"그럼 어떡해..."

"또 뭘 어떡해!! 걔가 이런 상남자 김재환도 쪼는 험악한 날씨를 좋아하게 생겼어요? 더 무서워하면 모를까. 내 말 틀려?"

"맞는데..."



귀신이다, 라며 민현이 멋모르고 감탄하자 재환이 빽 하니 소릴 질렀다. 미쳤어?!

처음보는 재환의 모습에 눈동자만 마구 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니까... 그게...



"나 멀쩡한 거 알았으면 어? 나는 지금 내새끼 보러 가야겠수다, 하고 떠야 될 거 아니야. 아우, 답답해."

"선호랑 나랑... 아무 사이 아니잖아, 이제."



침울하게 죄없는 아랫입술만 물어뜯고 있는 민현을 복장터진다는 눈길로 보다 재환이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이보세요.



"그래서 걔랑 아무 사이 아니라서 그렇게 술을 퍼드시고 걔 얘기만 나와도 눈에 지진나는 거에요?"

"사랑했었으니까..."

"말은 똑바로 하자. 사랑하는 이겠지. 안 그래?"



사랑하는...

재환의 말을 똑같이 따라하다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저는 그럴 사람이 못 된다.



"형... 진짜 이럴거에요?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도망쳐요. 형은 지금 유선호 못 잊어서 바둥대고 유선호는, 그래, 걔는 어떨지 모르지. 근데 내가 봐왔던 둘은 서로가 싫어져서, 질려서 멀어질 사람들이 아니거든. 그리고 선호가 아무리 꼬맹이라지만 걔도 성인이고 제 할 일 하는 애니까 둘이 잘 해나갈거잖아, 안그래요? 형이 지금 최소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곳은 유선호 앞이지 내 앞이 아니라고. 맨날 울상만 지을거면 가서 잡아. 무릎이라도 꿇어보든가..."



마구 몰아치는 재환의 말에 민현은 가만히 제 손을 잡은 그의 온기를 느끼다 고개를 들었다. 재환아.



"응."

"나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이제 선호가 나 안 좋아하면 어쩌지..."

"아, 내가 말했잖아요. 무릎이라도 꿇으라니까? 형 그리고 해결 못하면 회사 일로 계속 봐야할 때 어떡할 거에요."



선호, 회사 그만 둔 댔는데...

말 끝을 흐리는 민현을 보며 재환은 다시 잠깐동안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회사를 관둬?

그리고 민현의 가방에 풀어놓은 짐들을 죄다 쑤셔박기 시작했다.

아, 재환아 잠만. 빨리 안 뛰어가고 뭐해요. 오늘밖에 없어!! 어디에요, 답사인지 뭔지 가는 곳. 그, 지금쯤은 올라오고 있을걸. 그럼 집으로 가야겠네.

짐을 대충 싸버린 재환이 민현과 눈을 마주치며 진지하게 말했다.



"형, 미션은 유선호 집 앞에서 기다리다 오는 유선호한테 무릎꿇고 매달려서 재결합하기에요. 성공할 때까지 병실 출입금지."



민현은 재환의 단호한 모습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넌 괜찮겠어?

재환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베시시 웃었다. 제 꽃 참 다정하기도 하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요.


빨리가라며 밀어내는 그에 민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병실을 나왔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싶어 머릿속이 잔뜩 어지러진다.

제가 이별을 고하고선 다시 붙잡는다.

선호가 정말 제게서 뒤 돌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벌써부터 암울해졌다.

멍청하긴, 저는 이미 선호에게서 뒤돌아섰었으면서.

제가 준 상처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좁은 머리에 비웃음이 나왔다.

그래, 갈 데까진 가 봐야지.


저가 선호의 집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과 선호가 선호의 집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추 비슷하다.

물론 선호가 한눈 팔지 않고 곧장 온다는 보장 아래서지만, 빨리 가야한다.


밖엔 비가 무척이나 많이 내리고 있었다.

우산이 없지만 살 처지는 못 되었다.

민현은 가방안에 있던 겉옷을 둘러쓰고 빗속을 달려나갔다.



* * *



덜컹거리는 기차의 어느 창가쪽 자리에는 선호가 멍하니 앉아있었다.

푸르게 어둑한 창밖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유리에 갖다댄다. 차가워.

손바닥을 얌전히 붙였다 떼는 것이 무심하다.

어느새 손자국이 남아버린 창에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지친다, 정말.

짧다면 짧은 이틀이었지만 저에게는 무척이나 길게도 느껴졌었다.

그 무엇 하나 저를 도와주는 상황이 없고, 그 어떤 것도 저를 위한 것이 없었다.



첫날의 유선호는 엉망이었다.

잔뜩 처진 기분에 어울리는 어둑한 하늘, 그리고 미친듯이 몰아치는 바람까지.

게다가 회의 장소며 식사 장소, 숙소와 관광할 거리까지 제가 다 해결해야했기에 무척이나 바빴다.

민현을 원망할 겨를따위는 없었다. 그저 빨리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하루에 몰아 다녔을 뿐이었다.

밤이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온 선호는 옷도 벗지 못한 채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갖다댄 손이 닿은 얼굴이 차갑다.

몇시인지 확인하려 켠 핸드폰의 화면이 어두웠다. 종일 여러곳에 전화를 해야했기에 배터리가 달았던 것이리라.

낯선 곳에 대한 막연한 긴장감과 하루의 끝이라는 데 대한 막연한 안도감이 온몸을 감쌌다.

급속도로 피곤해져 감은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눈을 뜨고 응시한 정면의 벽이 흐릿했다. 하얗다. 아니, 어둡다. 아닌가, 붉은가...

무거운 숨을 감추려 다리를 곱게 접어 무릎을 끌어안았다. 가만히 턱을 기대니 온갖 생각이 쏟아져나온다.

황민현. 그래, 제일 먼저 뛰쳐나올 줄 알았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저도 스스로가 참 우습다.

그래서 왜 갑자기 못 온다고 하셨을까. 무슨 중요한 일이시길래 나까지 놔두고, 정말.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눈을 감고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아, 우리 아무 사이 아니지.


민현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저는 오랜만에 둘이 함께한다는 생각에 알게모르게 신경쓰였었는데, 다 헛것이었다.

그는 참 쉽게도 함께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참 밉게도.

그래, 그만큼 저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을테니까. 그래두 예전에는...

그러다 고개를 젓는다. 그때의 일이 무슨 상관인가. 지난일인데.

그렇게 선호는 한참동안 스스로에게 날을 세웠다.

그리고 간간히 내리치는 천둥소리가 매서워 입술을 물었다. 애도 아니고, 정말.

손으로 귀를 막아도 자꾸만 파고들었다. 꼭 저를 질책하는 것만 같아 물에 젖은 솜처럼 축 늘어진 채 안절부절 못했다.

아침이 고팠다.



아침도 선호에게 그닥 따스한 감정을 전해주진 못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이 무섭게도 찌푸려진 하늘과 더불어 여름이 아닌 양 구는 서늘한 날씨에 잠을 설쳤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제가 싫어하는 그 태풍때문이다, 싶어 절로 미간이 좁혀진다.

늦은 점심무렵까지 한군데를 더 다녀온 뒤 기차에 올랐다. 좌석에 앉아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얼마나 걸린댔지, 세시간? 집에 도착하려면 네시간쯤...

벌써부터 목이 뻐근해지는 듯해 고개를 살살 돌렸다. 거의 다 끝났다.


회사,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

이동하는 내내 마음 한구석에서 저를 괴롭히던 주제였다.

낙하산으로 들어간 곳이지만 저도 이제 성인인만큼 한사람의 역할은 해야겠다 싶어 단단히 다짐했었다.

그리고 몇달만에 그게 무너져버렸지만.

얄궃은 운명이다- 하는 제 안의 외침때문에 그때는 한없이 멍했었는데. 그는 어땠을까.

답사같은 거 가지 않아도 좋았었다. 멋모르고 낙하산이니까, 그래, 최선을 다해야지 하는...

하, 절로 비웃음이 난다. 슬슬 올라가는 입꼬리에 마음이 싸해진다.

반년째 유선호는 솔직하지 못했다.



무언가 가득 차 넘쳐흐를 지경인 머리를 가누며 열차에서 내렸다. 그리 늦은 저녁도 아닌데 어둡다.

버스를 타러가는 와중에 걸려온 전화에 무성의하게 응답했다.

응, 왜. 너 어디야? 집 가는중. 야, 애들 모이는데 너도 와라.

버스에 타 짐을 옆좌석에 올려놓으며 고개를 모로 틀었다. 지금?

잠시 고민하는 체 했지만 사실 제가 말할 것은 정해져있었다.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물이 미지근하다.

올거야? 나중에, 피곤해서.

짜식, 잘 나오지도 않아 요새, 하며 투덜대는 친구의 말을 건성건성 받아넘긴다. 바빠, 미안.

알았다며 끊긴 핸드폰을 옆으로 밀어두곤 습관적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어쩐지 추위가 느껴져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집에 먹을 게 없겠다 싶어 근처 마트에서 냉동식품만 이것저것 샀다.

늦은 저녁을 해야했기에 허기진 뱃속이 자꾸만 갖가지 음식을 찾았다.

다 사고 가져가려고 보니 너무 충동구매인 것 같다.

스트레스 받을 땐 먹는 게 최고야, 하며 한 팔에 큰 봉지를 걸고 집으로 향했다.



내내 선호를 괴롭히던 바람이 조금 잦아들고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걷던 선호의 발걸음이 갑자기 느려졌다.

집 앞 가로등 아래 자리한 실루엣이 눈에 익었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저와 눈을 마주친 사람이 멍하니 웃어왔다. 안녕.


미치겠다, 진짜.


도저히 그 앞에서 뒤돌 수 없었다. 하, 어떤의미에서 정말 대단했었네.

굳은 마음이었구나 싶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손이 우산의 손잡이를 놓으려 해 의식적으로 꽉 움켜쥐었다.

여전히 다정한 얼굴 위를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타고 흘렀다.

잔인한 사람이라며 다가갔다. 우산을 씌워주며 흘리듯 중얼댄다. 들어와.

저를 알아달라며 자그마한 불씨가 까만 발자국을 남기며 마음속에서 통통 튀었다.

선호는 가슴께를 손으로 꾹 누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은 이쪽, 씻고 와.

언제부터 그자리에 있었던 건지 온통 빗물범벅인 민현에게 씻으라며 안내해준 뒤 부엌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고 물소리가 들리자 참았던 숨이 터져나왔다.

무엇부터 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아 주변을 배회하다 봉지를 집어들었다. 저녁 안 먹었겠지.


대충 상을 차려 수저를 놓을 때 민현이 더운 공기를 안고 나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다가 선호의 고갯짓에 머뭇거리며 식탁앞에 앉는다. 잘 먹을게...

그 말에 고개만 끄덕이고 숟가락을 들었다.

저번보다는 식사가 편했다. 저에게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듯 민현의 손길도 자연스럽다.

빠르게 그릇을 비우고 싱크대로 향하자 민현이 제가 설거지를 한다며 일어섰다.

뒷머리를 긁적이다 욕실로 향했다. 기분이 이상하다.



샤워 후 말끔해져 나와보니 민현이 식탁앞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저를 바라봤다.

저번과는 어딘가 달라진 눈동자에 시선을 피해 방으로 가서 이불을 들고왔다.



"자고가."



날씨 안좋으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던 민현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풀썩 엎어지며 으아, 하는 소리를 냈다. 피곤해 죽을 것 같다.


빨리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눈을 감고 누웠는데 몇분째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왜 이러지 싶어 계속 자리를 바꿔 뒤척이다 결국 눈을 떴다.

습해서 틀었던 에어컨 때문에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거실의 민현이 추울 것 같다는 데 생각이 미쳐 조금 도톰한 이불을 갖다주려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덮어주고 떠나려는 데 자는 줄만 알았던 민현이 저를 불러왔다. 선호야.

놀라 허, 하고 숨을 들이쉬다 눈동자만 돌려 그를 쳐다봤다. 왜요.

옆으로 누워있던 그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얘기 좀 하자."

"할 얘기 없는데요."



반은 진심이었다.

이제 와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걸까. 기껏 정리해 놓은 책장을 무너뜨리고 싶은 걸까, 그는.



"그럼 듣기만 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요.

고개를 숙이고 아래만 응시하던 민현이 주저하듯 내뱉었다.



"회사... 그만두지 않았으면 해."

"싫어요."



즉각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듣기만 하려했었는데, 싶은 마음과 무엇인가 울컥하는 마음이 충돌해 파장을 일으킨다.



"왜?"

"그거 다니면 뭐해요. 저랑 안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조금 힘들어서."



그만 둘 거에요.

민현의 말은 역시 듣기 힘들었다. 못하겠다 싶어 몸을 돌렸다. 안 들을래요, 잘게요.

하지만 다음 순간, 선호는 다시 숨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정말, 나.

민현이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지금...이게...



"...뭐해요, 일어나요. 무릎을 왜 꿇어."

"나, 많이 무서웠어."

"......"

"너 잃을까봐."

"...지금..."

"그래서 너를 내가 너무 잡아둘까봐, 먼저 놨어."

"...무슨 말 하는 거에요."



목소리가 떨려서 나왔다. 가다듬을 틈도 없이 머릿속이 뱅뱅 돌았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감이 오질 않았다. 아니, 그 전에 제 앞에 있는 사람이 그 황민현이 맞나 싶었다.



"내가 너 많이 좋아해, 선호야. 그때도, 지금도, 나중에도.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 널 잡을거야. 아니지. 네게서 뒤돌지 않았겠다. 너랑 헤어지고 하루도 제대로 산 적이 없어. 내 부분부분이 전부 너라서, 나 너무 아팠어..."

"...우는 거야?"



주먹 쥔 손을 다리위에 올린 채 눈을 내리깔았던 민현이 끝내 저와 같이 떨리는 목소리를 했다.

황민현, 바보같이 지금 뭐하자는 거야...

민현의 앞에 주저앉아 부들거리는 손을 그 뺨에 가져다댔다. 따뜻한 액체가 닿았다.

평소에는 안울던 사람이 왜 이제와서 그래요... 사람 마음 이상하게...

한번 새어나온 진심은 끝을 모르고 흘렀다.

결국 떨리는 목소리가 울음섞인 말이 되어 춤을 췄다.



"재환이가, 흐으, 그러더라. 미쳤냐고. 그래서, 흐, 왔어."



나 너한테 미친 것 같아서.

그리곤 그렁그렁 눈물맺힌 눈가를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나 다시 시작하자고 말할거야, 너한테. 대답은 무조건 긍정해. 다른 말은 안들어."



하,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렇게 저 하자는 대로 다 하던 사람이, 무조건 듣기만 하던 사람이 제 하고픈 말만 하고 제 듣고픈 말만 듣겠단다.

꺼리는 웃음이 아니었다.

저도 그를 따라 울 것만 같아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손은 여전히 민현의 볼에 댄 채 그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응.

입술을 깨물던 그가 붉어진 눈가에 다시 물방울을 맺었다. 선호야, 우리 선호... 응, 여기있으니까, 울지마요.


나도 울 것 같잖아.

마른 눈가를 벅벅 비비고 민현의 품에 달려들었다.

무릎을 꿇었던 자세가 풀려 뒤로 넘어가 앉혀진다. 얼마만의 포옹인지 모르겠다.

그새 살 엄청빠졌구나, 하며 가슴에 얼굴을 문질렀다. 좀 먹고 다니던가...

제 등뒤로 둘러지는 민현의 팔에 행복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진작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미안해..."

"미안하단 말은 하지 말자 우리, 알겠지."

"...사랑해."



꿈 같았다.

저에게 닿는 민현의 온기가, 계속 빠르게 뛰어대는 심장이, 한계치까지 들뜬 머리가, 모두 뒤엉켰다.

제 부분부분도 민현이었다는 걸 알아버린 후라 제어할 수 없었다.



"나 이제 안어려요. 내가 지켜줄 거니까, 형은 가만히 내 뒤에 있어줘요."


그 말에 민현이 투정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다 핑계였단 말이야... 잊어, 그냥. 내가 막 너한테 집착할까봐...흐엉...

겨우 그쳤는데 다시 울 것 같은 말에 선호가 웃으며 그를 토닥였다. 알았어, 알았어.

비 맞더니 황민현 많이 어려졌네, 하자 민현이 아니야, 하고 응수해온다.




밖은 여전히 어둡고 어지러웠다.

제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 한데 모여 뛰놀았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 눈을 감고 귀를 막았으리라.

오늘의 선호는 호의적이었다. 전부 다 좋아.

잃어버린 반을 찾고 나니 그 두려움이며 떨림이 사라지는 것이 참 신기했다.

채 실감이 나지 않아 민현과 눈을 맞추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제 안에서 뛰놀던 불씨가 자리를 다시 잡았다.

구석진 곳에 감추려고만 했던 그것이 이젠 가장 앞에 있겠다며 팔랑거리며 나선다.

이때문에 마음이 간지러워 웃음이 나는구나 했다.

작디작은 불씨가, 그 기억이, 사랑이 다시 저를 가득 메울 때 정말이지, 선호는 소리라도 지르고싶었다.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아- 하고.

태풍이 몰아쳐 지나간 자리가 고요히 말끔하듯 잔뜩 몰아쳤던 마음의 자리에 안정이 찾아왔다.


내일 비가 올까? 와도 괜찮아. 왜, 싫은데. 내가 있잖아.

오글거려...그게뭐야, 라며 타박하는 선호의 얼굴에는 예쁜 무지개가 떠 있었다. 

그에 맞춰 좋으면 다 괜찮은 거야, 하는 민현의 얼굴에도.

둘은 그렇게 마냥 서로를 바라보다 웃어버렸다. 

세상에 또 없을 참으로 고운 얼굴을 하고.





태풍 w.해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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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입니다!

2일안에 올리고 싶었는데 자꾸 다듬다가...ㅋㅋㅋ큐ㅠㅠㅠ

아 결국 9200자 넘겼네요 하하...:D

반 나누려다 5화로 끝내겠다는 고집 하에 놔뒀습니당 흑흑

짧지만 같이 달려와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다른 중편 들고 금방 찾아올게요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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