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가을 겨울 중 가장 짧은 건 봄이랬다.

넌 나에게 가장 짧은 사랑이었다.



* * *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른다. 아니, 사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래서 저와 그가 끝나버린 것일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스스로에 대해, 당신에 대해, 우리 둘에 대해 탓하다 보면 그랬다.

언제나, 그래, 언제나처럼 그런 환상을 가졌다.

제가 조금만 더 솔직했더라면, 저는 그와 지금도 마주하고 있지 않을까.

저도 잘 안다. 그래서 환상인 것이다. 다시는 닿지 못할 꿈같은 것임을 알기 때문에.



쿵- 하고 재환이 거울에 이마를 박았다. 그 주위로 김이 서렸다. 젖은 얼굴에서 물방울이 뚝 떨어진다.

전혀 아프지 않은데, 많이 아파.

제가 생각해도 우습다. 실없이 흐 웃는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숨을 고르다 거울에서 천천히 떨어진다. 마주보는 곳에 선 저 아닌 제가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다. 웃을거면 웃던가.

눈가가 간질간질한 것이 거슬려 문지르면 더 따갑고 간지러워진다. 결국 재환은 오늘도 붉어진 눈으로 집을 나섰다.


이른 아침의 공기가 차가웠다. 아직 봄이기에 낮에 해가 중천에나 떠야 따뜻해질 것이다.

얇은 교복 마이만 걸친 재환이 몸을 웅크렸다. 생각보다 춥네.

거리에 슬슬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루가 열리는 시간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라며 웃었다.


코 앞에 있는 학교라 등교하기는 편했다. 그 덕에 종종 늦잠을 자 지각하긴 했지만.

간만에 일찍 온 학교는 한산했다. 생각보다 애들도 없고, 멀리서는 소란스러워도 주변은 조용하고.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적막감만이 재환을 반겼다. 동시에 제 반이 지각을 많이 하는 반인 것이 생각난다.

어쩐지 이 공간의 주인이 된 기분에 문을 닫고 빙글빙글 돌았다. 와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뒷자리 중간에 위치한 자리로 향해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고 털썩 앉았다.

뜻하지 않은, 원하지 않은 꿈을 꿔 평소보다 빨리 일어난 터라 약간의 피곤함이 묻어나왔다.

책상위에 두팔을 올리고 천장에서 바닥, 벽으로 시선을 옮기다 게시판에서 멈추어 세운다.

아, 보면 안되는데.

생각은 들었지만 제 눈은 이미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으니까.


초록색의 큰 게시판의 곳곳에는 온갖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그 아래 적힌 간략한 자기 소개들이 눈길을 끌었다.

재환의 시선은 그중 하나에 가 꽂혔다. 찬찬히 그것을 흝는 시선이 굼떴다.

사진 속의 그는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활짝 폈을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재환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래 적힌 글을 읽다보니 어느새 웃고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재치있게 적힌 소개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애써 생각을 이어가지 않으려 책상에 가지런히 올려진 손을 쥐었다 폈다 해본다.

초조해지려는 순간 앞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들어온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때, 재환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들어오다 말고 눈을 크게 뜬 채 그 자리에 멈춰섰다.

정말 거짓말처럼, 주인공이 등장해버렸다.



"...민현아, 안녕."

"...안녕."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하고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무어 흥미로운 것이라도 있는 양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인사, 그래도 받아줬네. 무슨 말이라도 더 해야하는 걸까.

한참을 고민하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던 민현에게 말을 건넸다. 황민현. 어?

원래 저런 식으로 대답해주는 애가 아니었는데. 하마터면 하려던 말도 잊고 멍하니 쳐다볼 뻔했지만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빨리와?"

"...그냥. 원래 빨리 왔는데."



아, 그랬었지. 항상 저와 있을 때를 생각해버렸으니.

그렇구나... 하다 또 문열리는 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어, 하성운!



"엥? 와, 살다살다 김재환이 학교를 다 빨리오고... 오늘 뭐, 해가 서쪽에서 떴대?"

"에이 나야 항상 이시간에 오지."

"그짓말쟁이..."



아니그든.

실없는 장난질을 하다 성운이 민현에게 말을 걸자 저도 모르게 긴장된 숨을 삼켰다. 요, 황민현 오늘도 일찍 왔네.

그냥 웃으며 끄덕이던 그가 일어나서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말했다. 성운, 매점갈래?

이런 걸 마다할 하성운이 아니지, 하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성운이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리고 제게 고개를 돌린다. 김재환, 안가?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민현을 본 순간 제 답은 정해져있다는 걸 깨달았다. ...갈래.

민현과 잠시 시선이 얽히다 풀렸다. 어쩐지 한숨이 쉬고 싶어졌다.




매점은 그냥 민현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어 따라간 것이었기에 딱히 사고 싶은 건 없었다.

그냥 종알대는 성운을 간간히 받아주고 민현의 침착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계산대 옆에서 막대사탕이 잔뜩 꽂힌 걸 보고 그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노란색 포장지가 예쁜 레몬맛 사탕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주머니에 대충 찔러넣은 채 반으로 향하는데 성운이 제게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맞아. 황민현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지가 이번에 전교 일등을 해보겠대. 자신 있다고 막."

"뭐...?"

"나 무시하네. 하면 하거든?"

"작년 성적을 좀 생각해보자, 민현아."

"나야 뭐, 작년에도 탑이었지."

"이야, 허언증 봐..."



들었냐, 방금?

호들갑을 떠는 성운의 옆에서 재환은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쟤 원래 저래, 하는 말과 함께.

다른 말을 끼워넣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할라 치면 입이 떨어지질 않아 일부러 크게 웃으며 성운과 장난쳤다.

황민현 뻔뻔한 거 여전해, 정말. 그니까...

아무 의미없이 날린 리액션들은 다시 자신에게 날아왔다. 참 가벼히. 그리고 제 기분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재환은 교복인 채로 침대에 누워 베개를 껴안았다.

제가 생각해도 하루종일 저는 지나치게 정신이 없었더랬다. 성운의 말대로 월요병인가 싶었다.

실은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모르는 체 하기로 결심했으니까.

한숨을 푹 내쉰 재환이 베개를 내려놓고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제 집과 학교 사이에 놓인 자그마한 공원이 내다보이는 위치다.

하교하는 학생들 사이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젠장.

입술을 잘근잘근 물다 그 인영이 웃으며 누군가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걸 보곤 커튼을 쳐버린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그러다 자신이 참 한심해져 푸스스 웃는다. 그와 제가 뭐라고.

무엇이어야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나, 그냥 조금 신경써도 되지 않을까.


한번 열어놓은 틈은 벌려지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었다.

이름 하나 언급하는 것이 떨려 애써 감추고만 있는데 이렇게 깊이까지 살펴도 되는 걸까 싶다.

저도 안다. 모르는 체 하기로 마음먹은지 반나절도 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굳이굳이 제가 말을 걸었던 그때부터, 아니다, 제 꿈에 뿅 나타났을 때부터 그건 무리였었다.

이제야 조금 마음이 편하니, 안쪽의 저는 물어온다.

그럼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어느새 커튼을 다시 열어 그를 바라보는 절 깨닫고는 어쩔 수 없음에 쥐고있던 긴장의 끈을 놓았다.

될 때까지 해봐, 김재환.

참 바보 같았다.



* * *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재환은 학교에 일찍 갈 수 없었다.

그 날은 꿈에 나온 민현이 너무나도 다정해서 달콤한 거리감에 휘감겨 가능했던 거였나.

결국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금요일에야 그는 빨리 눈을 뜰 수 있었다.

물론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 머리야."



머릿속이 웅웅거린다. 누군가 제 안에서 방방 뛰어대는 것만 같아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감기와는 거리가 멀었던 저인데 요새 스트레스를 좀 받아 찬공기를 자주 쐬느라 걸려버린 것 같다.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저은 후 비틀대는 몸을 힘겹게 가누며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를 붙잡고 몇 초간 서 있자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든다.

오늘만 다녀오면 주말이니까... 하며 간신히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이 쏟아지는 건지 제가 쏟아지는 건지 잘 모를 지경이었지만.



재환은 침대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게 느껴져 보건실이나 가야겠다 하고 학교에 왔다.

아니나 다를까, 이른 아침인지라 보건선생님이 아직 오지 않으셨음에 다시한번 깊은 피곤함을 느꼈다.

교실에 가서 누워있어야지... 하고 들어서는데 저보다 먼저 와 있던 사람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괜히 심장이 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꿎은 머리만 매만지며 조용히 자리에 앉으려고 노력했다. 작게 의자끄는 소리에도 저 혼자 놀라버린다.

이어폰을 꽂고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민현의 뒷모습이 참 곧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쓸데없는 감상은 접어두자.

지끈거리는 머리를 무시하려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벽에 걸린 시계가 7시 20분을 가리키는 걸 보곤 와, 일찍도 왔네 하는 소리없는 감탄을 토해냈다.

맨날 아파야겠네, 이거.


평소와는 많이 다른 날이다. 그렇다보니 평소와는 다른 감정이 마구마구 들었다.

같은 공간에 둘만 있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며칠 전 일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더 됐으니까.

책상에 엎드린 채 팔에 머리를 대고 있으니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조금 자 둘까. 이따 1교시 시작 전에 보건실이나 가야겠다...

눈은 감았지만 온갖 것들이 북을 쳐 대는 머리가 잠에 드는 것을 자꾸 방해했다.

편의점에서 약이라도 사왔어야 했나보다, 하고 뒤척이는데 무언가 저를 툭 치는 느낌에 부스스 일어났다.



"어디 아파?"



...놀래라.


사람 간 떨어지게, 진짜.

재환이 제 앞자리에 앉아 물끄러미 눈을 마주치는 민현을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월요일 이후로는 일종의 시위라도 하듯 근처에 있거나 한무리에 있어도 말을 섞지 않았었다.

제가 항상 먼저 말을 걸어야했던 것에 대한 조그마한 불만의 표출, 뭐 그런 거였는데 또 막상 안하던 행동을 해 오니 당황스러운 동시에 살짝 설레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하고 내뱉은 목소리가 거칠어 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었다. 아까는 괜찮더만 왜 이래 갑자기.



"감기 걸렸어?"

"그런...큼, 그런가봐."



아, 목 정말...

계속 큼큼거리는 재환을 보던 민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병원은? 안갔지... 약 먹어야될 것 같은데. 보건실 가자.

낯설다. 감기보다도 이 상황이 더 곤욕스러웠던 재환이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내, 내가 알아서 갈게.

민현은 가만히 턱을 괴고 그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그 차분한 눈길에 재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너 감기 걸리면 한참 고생하잖아. 따뜻하게 좀 입고 다니지, 그니까."



저도 그 말을 하기 조금 그랬는지 줄곧 제게 보내던 시선을 거두곤 잠시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입을 달싹이는 가 싶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따 보건실 꼭 가. 약도 먹고.

이내 교실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그가 무거운 머리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다.

이게 엎친 데 덮친 격이지 뭐야...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아니, 기절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부터 남은 오늘이 뻔했다. 여러모로 힘들고 지치는 하루가 될 것이다.





봄바람 w.해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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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를 달리해봤어요:3 어두운 것 쓰기 싫지만 비가 오는데 어떡해...ToT

메인은 처음인 년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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