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하나 컨트롤 못해 여태 쌓아온 것을 무너지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민현은 다시 한번 애써 자신을 감추었다.


- - - - -


태풍이 아직 저 아랫동네에서 미적대고 있나, 싶게 하늘이 밝다.
조금 습하긴 했지만 햇빛이 깔끔하게 커튼을 비집고 들어와 인사를 건네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날씨가 좋은 건 좋은거고... 좀 더 자고싶었는데.


알람이 울리지 않았어도 저절로 눈을 띄워버린 제 몸을 원망하며 민현은 상체를 세워 앉았다.
멍하니 반대편 벽을 응시하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꽤나 이른 아침이다.
간단히 씻고 나와 오랜만에 직접 커피를 내리기로 마음먹고 이것저것 꺼냈다.
주말에도 한가함 따위 찾지 않았기에 이런 느낌은 상당히 오랜만이다.
원두 갈리는 소리가 기분좋은 소음으로 다가왔다.

커피잔을 들고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창가에 다가섰다.
날씨가 이리 좋으니 우산은 필요없을 듯 싶었다.
창 밖으로 살짝 뻗은 손끝에 감기는 공기가 후덥지근하다.
보이지 않는 열기와 묵직한 수증기가 뒤섞여있는 듯 해 무언가를 내쫓듯 손을 휘저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들떠오는, 그런 날이다.

커피가 미지근해질 때쯤 전화벨이 울렸다.
재환이다.

민현이 커피의 잔잔한 표면을 바라보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고요하던 액체에 미묘한 파동이 일었다.


* * *


-여보세요.
"아, 형. 저에요."
-어, 재환아.


며칠 째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던 재환은  피곤이 쌓일대로 쌓여있었다.
너무너무 힘들어, 정말.
당분간 보기 어려울 것 같은데 전화라도 해볼까 싶어 민현에게 콜을 넣었던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제 이름을 불러주는 그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형...저 너무 힘들어요..."
-왜,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아니구...
금세 투덜거리기 시작한 재환에 민현은 간혹 짧게 웃으며 그를 받아주었다. 그래, 그러네.


"인간적으로, 너무 힘들잖아, 어?"
-그치. 우리 재환이가 고생하네.
"히..."


칭얼대는 아이를 우쭈쭈하며 달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진 재환이 얼른 다른 말을 꺼냈다.


"아 참, 형 출근해야죠. 어쩐지 아침인데 전화를 바로 받더라."
-아냐, 괜찮아. 나 오늘 답사라 조금 늦게 나가거든.
"오호, 그렇군. 어딜 그렇게 자주 다녀요. 나만큼 바쁜거 같은데?
-에이, 그 정도는 아니고...


그래도 형 일 열심히 하는 건 맞잖아요... 민현이 형도 어? 여행 좀 다니구 그래요. 지금 저희 부모님 해외여행 가셨는데 너무 좋다구... 아유 시간만 됐으면 나도 가는 거였는데. 응응, 나중에 가면 되니까.

재환이 등받이에 한껏 제 몸을 기댄 채 다리만 달랑달랑 흔들며 전화를 이어나갔다.
나중에 저랑도 여행 한 번 가야죠, 형, 하는 수작도 살짝 부려보고.
웃으며 생각해보겠다고만 하는 민현에 살짝 아쉬워도 하고.


-오늘 날씨 되게 좋다.
"그러게요. 비가 그렇게 오더니만..."
-그니까. 여전히 더워, 밖에. 스케쥴 조심히 다녀오고.
"네 형! 형도 조심히 다녀와요."


알았어, 고마워. 하는 민현에 나중에 연락할게요, 하고 전화를 끊은 재환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시 내쉬며 차창을 바라보았다.


아, 풍경 보고싶었는데.


거대한 트럭이 제 차옆에서 달리느라 시야를 죄 가렸다.
안전벨트를 푸르고 봐야하나, 하다 이내 귀찮아져 좌석 등받이에 몸을 더 깊숙히 묻었다. 조금 뒤척이니 편안해진다.
잠이나 자야겠다며 재환은 핸드폰을 쥔 두 손을 허벅지에 가지런히 올린 후 눈을 감았다.


* * *


"아...젠장."


와이셔츠의 단추를 잠구며 급하게 움직이다 식탁위에 가득 따라놓았던 우유를 몽땅 엎어버렸다.


이걸 언제 치워...


선호는 가만히 정지해있다 한숨을 폭 내쉬고는 행주를 찾아 바닥이며 식탁을 꼼꼼이 닦아냈다. 아깝다, 이거.
싱크대에 행주를 대충 던져놓고 제 방으로 향하는 선호의 시련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


아, 겁나 아파.
울상을 지으며 무릎을 슥슥 문지르는 선호의 얼굴은 울상이 되어있었다. 팽팽하게 놓여있던 선풍기 줄을 못 본채 들어선 제 잘못이다.


씨이...아프잖아.


방바닥에 매몰차게도 부딪혀버린 무릎이며 다리를 껴안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평소에는 발끝에도 잘 닿지 않던 것이 오늘은 제대로 저를 휘감는 게 웬일이냔 말이다.

챙길 것은 다 챙겼다 싶어 가방을 가지고 아파트 밖으로 나섰던 선호는 곧 발끝부터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에 이를 갈았다. 


무슨 물웅덩이가...


화를 낼 힘조차 빠져버려 다시 올라가 신발이며 양말을 갈아신은 그의 눈에 까만 우산이 들어왔다.
민현이 빌려준 것인데, 가져다 줘야 하지 않나 싶어 손에 쥐었다.

아직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시간인데 참 많이 고생했던 터라 지쳐버린 선호는 근처 편의점에서 박카스 한병을 사서 나왔다.
그리고 어김없이 지갑을 계산대에 올려놓고 온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되돌아갔다.
운이 지지리도 없네, 하며 제 지갑을 찾아와 횡단보도쪽으로 가는데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난데.


민현이었다.
선호는 뜯지 않은 박카스에서 횡단보도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민현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볍게 눈동자가 떨린다.
바닥을 쳐다보며 무슨무슨 말을 하는 그가 여느때와 비슷해보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같이 못 갈 것 같아. 미안.


표는 톡으로 보내놨으니까 올때도 타고 오고. 정말 미안해.

눈을 깜빡였다.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사실 그가 어떤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순식간에 제가 어린애가 되어버린 듯해 멍하니 저쪽의 민현만 눈으로 좇았다.
초록불로 바뀌어버린 신호등은 대수가 아니었다.


"...회사 관둘거에요."


여전히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무미건조하게 내뱉은 말에 상대가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하고 대답해온다.
하늘을 한 번 올려다 본 민현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제게서 등을 진다.


-조심히 잘 다녀와. 정말 조심해.


아무 대꾸없이 눈을 감았다 뜬다.
민현의 뒷모습을 담던 선호의 눈동자가 고요히 가라앉았다.

이로써 두번째다. 그가 제 앞에서 등을 돌린 것이.


운 참 지지리도 없지.

손에 들려진 우산이 무겁게도 느껴졌다.
너도 주인 잃은 신세인 거야, 하며 다잡는다.


* * *


"빨리 가주세요."


뒤돌아 조금 걷는가 싶던 민현은 점점 달리기 시작해 결국 급하게 택시를 잡아 탔다.

행선지를 말하고 빨리 가달라 한 후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창문을 바라봤다.

그곳에 비친 제 얼굴이 참 엉망이다.

저도 모르게 한껏 물던 입술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동시에 재환이 저를 과장스레 따라하던 것이 떠오른다.

민현이 긴장어린 한숨을 내쉬며 마른 세수를 했다. 아까 걸려온 전화가 도무지 잊혀지지 않았다.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끔찍해.


도로 위를 질주하던 택시가 멈추고 민현은 재빨리 튕기듯 내렸다.

건물에 들어서서 어디로 가야하지, 하던 그의 눈에 응급실이라는 표지가 눈에 걸렸다.

그는 다시 입술을 깨물 수 밖에 없었다.


온통 적막한 가운데 민현 혼자 멍하니 앉아있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한결같이 초조하고 어쩔 줄 모르는 마음에 까만 핸드폰 액정만 톡톡 두드려댔다.

절로 막막한 숨이 내뱉어진다.

다시 한번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때 수술중이라는 화면이 꺼지고 문이 열렸다.

민현이 다급히 일어나 의사에게 다가갔다.



"저, 재환이는..."

"일단 잘 끝났습니다, 수술은."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다행이다.
경과는 지켜봐야겠지만 다리에 큰 부상을 입은거라 조금 아물면 걷는 연습에 치중하셔야 하고... 나중에 회복해도 격한 운동은 삼가해야됩니다, 하는 말을 경청하다 병실로 들어가 누워있는 재환의 옆에 섰다.

발랄하게 웃던 그는 어디에 있는지 축 늘어진 채 기계에 의존해 옅게 숨을 내쉬는 그가 낯설었다.

간이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손끝만 바라보다 크게 울리는 천둥소리에 밖을 쳐다봤다.

태풍을 잊고 있었다.



재환은 반나절이 지나도 깨어나지 못했다.

계속 그 옆을 지키고 있던 민현이 병실안에 있던 TV에서 나오는 뉴스에 걱정어린 눈빛을 했다.
졸음운전을 하던 트럭때문에 일어난 4중추돌사고...가수 김재환이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채로 병원으로 이송됐다, 라.

실검 1위한다 너. 이제 어떡할래?

침대위에 놓여진 재환의 손을 무의식적으로 만지작대다 그 끝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에 퍼뜩 놀라 시선을 돌렸다.

부스럭거리며 살짝 뒤척이는가 싶던 재환이 눈을 차츰 떴다.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여는 그에 민현이 급히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가 이것 저것 체크해주고 나간 후 재환이 민현을 불러왔다. 형.



"괜찮아, 재환아?"



조금... 안 괜찮은데.

하는 말에 민현이 다시 어두운 표정을 짓자 재환이 씩 웃었다. 아이, 괜찮아요.

약간 침체되어있는 민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형, 저 입원 처음이에요."

"이런 건 안해도 돼."



아 그래도, 뭔가 설레는게... 진짜 혼난다, 김재환. 살면서 입원도 한번 해보고 그래야지, 남자라면! 야, 너...

투닥거리던 재환과 민현의 사이에 갑자기 굉음이 끼어들었다.

엄마야, 왜 이렇게 소리 커...

담요를 제쪽으로 끌어당긴 재환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고 민현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이내 내리깔았다.



"태풍...온댔어."



아하, 비 엄청 오겠네.

재환이 까맣게 물든 바깥을 바라볼때 민현은 그저 제 무릎에 놓인 담요의 끝자락만 만지작거렸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저가 참 우습다.

정돈되지 않은 담요자락이 꼭 저였기에 무작정 잡아당겼다.

풀릴 듯 말 듯한 올에 애가 탄다.

이게 풀려나면 저는 자유가 될 것인데도 더 세게 당기질 못한다.

결국 다시 묶어줘버린다.

차라리 담요였으면 좋았을걸, 저는 왜 사람이라.


민현은 하늘이 참 야속했다.





태풍 w.해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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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감기에 걸려서 되도 않게 고생했네요ㅠㅠ 더위 조심 에어컨 조심하세요X)

태풍 04 분량조절 실패했습니다...원하는 씬에서 끝나려면 이번화의 2/3만큼을 더 써야 할 것 같아서ToT

다음 편이 아마 마지막편이기 때문에 가장 분량이 많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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