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호의 향, 약간의 비 냄새, 그리고 눈물 냄새가 났다.
선호가 제 옆에 있는 것 같았다. 육개월 전 그때 그 가로등 아래서 놓지 못해 안고 있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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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오피스텔에 멈추고 운전해주신 기사님께 잘 되지 않는 발음을 굴려 감사하다 한 후 집으로 들어섰다.
평소였으면 옷은 어디에 걸고 정리를 한다며 부산을 떨었을 텐데 그 새벽의 민현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술이 들어가니 사람이 참 솔직해졌다.
미친듯이 밀려오는 감정끝에 항상 선호가 있었다.


슬픈데, 유선호가 날 처음보는 양 굴어서... 기쁜데, 오랜만에 우리 선호 보니까...


더이상 부담을 줘서는 안된다. 이미 선호에게 상처를 줄대로 줘버렸는데, 나 진짜 나쁜 놈인데.
어린 선호와 연애를 하면서 항상 생각했다. 이 아이는 내가 지켜줘야 한다고.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불안했다.
지금은 우리의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할 수 있다고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멀리서 저를 보면 환하게 웃으며 달려와 안기는 선호가 마냥 사랑스러웠지만, 이 아이가 주변으로부터 상처받을 것이 두려웠다.
항상 옆에 있고 싶고, 무엇이든 해주고싶었지만 부담스러워할까 걱정했다.
점점 집착하게 되는 자신에 스스로 지쳐버렸다.
선호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누구와 있는지, 언젠가 자신이 싫어졌다고 하지는 않을지.
선호는 민현의 소유욕에 가끔 투정을 부릴뿐 여전히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랑한다며 안겨오는 선호를 마주 안아주며 민현은 불안한 마음을 억눌렀다.
그리고 선호가 친구네 집에서 놀다 잠들어버려 전화 한통 못 했던 날, 결국 구겨지던 마음이 터져버렸다.
다음날 일어난 선호가 급히 민현에게 전화를 하고 학교로 찾아갔지만 민현을 볼 수는 없었다.
하루종일 연락이 되질 않던 민현과 선호가 마주친 것은 그날 밤 선호의 집 앞 가로등 아래서였다.
이상하게도 웃고 있는 민현을 보고 선호는 울었다.
세상이 그렇게 서러운 일은 없을 것처럼 울고, 또 울었다.
어리다면 어린 아이지만 눈물에 인색한 아이였는데.
울지마, 이쁜 얼굴 다 상하네. 뚝해, 뚝.
민현은 놀라지도, 따라 울지도 않았다.
그저 선호를 품에 안고 눈물을 닦아줬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선호의 머리에 자신의 얼굴을 묻고 그를 토닥이던 민현은 울음을 잦아들 때쯤 자신의 품에 안긴 여린 몸을 밀어냈다.
선호야, 하는 부름에 고개를 저으며 다시 안겨온다.
그럼 자신은 쓰게 웃으며 밀어낸다.
선호야, 있잖아. 아니요. 싫어요.
나도, 나도 싫은데...
속으로 그말을 삼키면서 제대로 안기지도 못한 채 꼭 감은 눈과 떨리는 손을 하고 제게 기대고만 있는 선호를 끌어안았다.
선호야, 선호야, 우리 선호.
놓을 수가 없었다. 들이쉬는 숨에 섞인 체취가 달큰해서 손끝이 아려왔다.
더 깊게 안고, 온 얼굴에 입맞추고, 하염없이 서로를 갈구했다.
더이상 끌면 안될 것 같아 결국 선호를 밀어냈다.
다시 울것만 같은 눈동자에 복잡하던 머릿속이 쨍하니 깨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웃었다.


우리 헤어지자.


그말에 선호가 어떤 반응을 보였었더라. 울었나? 아닌 것 같다. 화를 냈었나? 그것도 아니다.
맞아, 그때의 유선호는 웃었다.

노랗게 흐린 가로등 불빛아래, 반질거리게 젖은 눈으로 웃었다.


내가 돌아서서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다. 넌 아직 모든 게 어려서 내가 지켜주기 힘들어. 미안하다.
사실은 그런 게 아닌데.
널 지켜준다는 핑계로 내가 너에게 부담을 지울까봐, 널 상처줄까봐. 응, 그랬던 건데.
그날은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지금, 조금이라도 너와 내가 덜 사랑할 때 놓으면 서로 덜 아프게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한순간도 난 너를 덜 사랑한 적이 없었구나. 내가 서로에게 큰 흉터를 남겼구나.

내 일상의 모든 부분부분이 너였는데, 난 왜 몰랐을까.
익숙해져 버렸던 네가 이토록 아프게 다가올 줄 누가 알았을까.

그 후로 단 한번도 선호와 연락을 하지 않았다.
간혹 아침에 알람을 듣고 일어나도 30분간 멍하니 누워있곤 했다. 다시는 전화가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실수할까 두려워 술을 마시려 할때면 핸드폰을 꺼놓았다.
제 발걸음이 익숙한 거리로 들어서 선호의 집을 찾을때면 이를 악물고 발길을 돌려세웠다.
바쁘게 살면 잊혀지겠지, 라며 일자리를 구하다 친척의 소개로 한 회사에 입사했다.
미친듯이 일에만 집중하는 일과가 반복되었다. 쉴 틈이 없었다.
힘들면 누군가의 생각이 났고, 그럴수록 더욱 할 일을 찾았다.
반년만에 팀장을 맡았다.
주위에서는 민현더러 괴물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는 속으로 제 자신을 비웃었다. 그래, 이렇게 추악한 괴물이 또 어디있겠어.
그리고 점차 선호를 잊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다.

민현은 먹구름 가득 낀 새벽의 하늘처럼 제 머릿속이 그렇게 뒤죽박죽 엉키는 것을 느꼈다.
딱히 그 느낌이 싫지 않아 멍하니 흘러가도록 내버려뒀다.


선호야, 내일도 비가 올 것 같아.


* * *



"형, 새벽에 잘 들어갔어요?"

-어, 고맙다. 미안해...오랜만에 보는 거였는데. 다음에는 좋은 데서 식사 한번 하자.

"아이 고맙긴요. 비싼거 시킬거니까 미안해하지도 마요 형!"

-하하, 그래. 언제 출국해?

"지금 공항 가고 있어요. 그리구 이제 일본 가면 6일이니까...다음주 수요일? 그쯤 한국와요."

-오케이. 오면 연락 또 하고. 그때보자.

"네엡."



종료음과 함께 어두워지는 핸드폰을 보던 재환은 달력 앱을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음, 수요일은 오자마자 대표님이랑 미팅있댔고... 목요일에 광고 하나 행사하나. 아, 행사 둘. 금요일은 또... 아니 뭐가 이렇게 많아? 연예인 참 바쁘다...

잠시 투덜거리던 재환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대교 위를 달리는 차들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많이 왔다.


"형, 이러다가 비행기 못 뜨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엄청 오네."


재환은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채로 부루퉁하게 발장난을 쳤다.

비가 오니까 황민현이 떠오른다.

어제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파서 자꾸 딴청을 피우게 된다.

매끈한 갈색 머리카락을 손에 감고 빙빙 돌렸다.

육개월이면 잊을만한 시간아냐? 형은 유선호 좋아하는 거 같은데. 흠... 또 모르지. 유선호가 싫다고 했나? 그것도 좀.

재환의 기억속의 민현과 선호는 참 이상한 커플이었다.

선호가 민현을 좋아죽고, 민현은 선호에게 틱틱대면서도 그렇게 다정하게 바라봐 줄 수 없었다.

가끔 선호가 민현이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며 장난을 담아 시무룩해하면 안 그런 척 해도 민현은 당황해했다.

그리고 또 그 따뜻한 눈빛으로 선호에게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하고는 시선을 피한다.

그래서 유선호가 참 부러웠는데.

민현을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저는 아, 이 사람을 제가 좋아하겠구나 싶었다.

그 동시에 저는 이 사람을 잡을 수 없겠구나 싶었다.


웃겨, 황민현, 유선호. 내가 못 들이댄 건 둘이 지나치게 어울려서야. 근데 나한테 이렇게 빌미를 주면 어떡해.


절로 머릿속이 복잡해져왔다.

어제의 민현은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는데. 차라리 우는 것에 가깝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저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 먼 어딘가만 보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겠다는 그 심보가 제 눈에는 또 다 보여서 안쓰러웠다.


내가 이런 무기력한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런다고 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옆에서 술친구나 해줄 뿐이지.

지금 끼어들어 봤자 슬픈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민현을 마주할 수 있을 뿐 제게 하등 도움될 것이 없단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괜히 심통이 나 바닥에 끄적거리던 발을 들어 앞좌석을 퉁퉁 쳤다.

아, 김재환 뭐하냐! 형 운전 중인 거 안보여? 몰라몰라, 아무것도 안보여.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고작 한뼘 앞에 놓인 창 밖의 풍경도, 저의 황민현도.



* * *



선호를 다시 만나라는 지시가 있을까봐 민현은 긴장한 채 며칠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그렇게 민현과 선호가 재회한 뒤로 일주일이 흘렀다.



"황팀장, 그 다음 달에 세미나 있는 거 알지?"

"아, 네."

"답사 한번 가야 될 거 같아서."

"그럼 언제쯤 가면 될까요?"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내일 출발해서 대강 하루 쉰다 치고 다녀와."

"알겠습니다."

"아, 맞아. 저번에 봤던 친구 있지?"

"저번이라면 선호...씨요?"


담담하게 답하던 민현의 목소리가 살짝 커지는 가 싶더니 이내 가라앉는다.

설마.


"그래그래. 그 친구랑 해서 다녀와."


불길한 예감은 예로부터 틀린 적이 없다고 했다.

민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네...알겠습니다. 그래, 열심히 하고. 요즘 보기좋아, 하하. 감사합니다...


한순간에 머릿속이 잔뜩 헝크러졌다.

유선호한테만 이렇게 나약해져버린다.


나머지 반나절을 답지않게 허둥대며 보낸 민현은 집으로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맥주 한캔을 샀다.

요새 술을 자주 입에 대는 것 같은데...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TV를 켠 후 맥주를 홀짝이는데 문득 내일 답사를 가야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어디랬었지, 전주? 멀기도 하네.

대충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하다 선호의 것까지 차표를 예매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틀어놓은 채널에서는 뉴스가 끝나고 일기예보가 나오고 있었다.



-...에서 시작된 태풍이  금요일에 북상하기 시작하여 토요일, 일요일까지 남부지방과 중부지방에 많은 피해를 입힐 것으로 예상됩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태풍이 온단다.

민현의 표정이 절로 심각해졌다.


선호는 태풍을 무서워한다.


초등학생때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태풍이 붐에도 집에 가겠다며 나왔던 선호였다.

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데, 밖은 이미 쓰러진 나무며 떨어진 간판으로 어지러웠던 데다 거센 바람에 비를 막으려 폈던 우산이 뒤집히자 두려움이 밀려왔던 것이었다.

선호는 결국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며 커서도 비올때 바람이 조금이라도 세게 불어 우산이 뒤집힐 것 같으면 그때 생각이 나 저절로 무서워진다고 했었다.

그 얘기를 조곤조곤하던 선호가 어쩐지 불안감에 차 있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아, 내가 있는데 뭐, 했었는데.


이번에 태풍이 불면 곁에 있어줄 수 있다.

그러니까 불안해하지말았으면.

선호에게 몇시에 만나자, 하는 문자를 보내고 짐을 챙기다 마시다 남은 맥주캔을 발견했다.


내일은 답사가야하니까...


그대로 싱크대에 쏟아부었다.

한 방울까지 털어 버리고 재활용쓰레기 버릴 곳에 얌전히 놓아둔다.

어쩐지 소풍에 가는 아이처럼 들떠버린다.

날씨는 좋지 않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으니까.

제 스스로가 참 이기적이다 싶어 정신을 차리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저 하나 컨트롤 못해 여태 쌓아온 것을 무너지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민현은 다시 한번 애써 자신을 감추었다.





태풍 w.해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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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뿐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날씨는 정말 좋았네요:D 하루 마무리 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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