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도 널 그리워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선호야."


놀란 선호의 토끼같은 눈을 보며 민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 - - - -



"자, 민현씨도 왔으니 통성명만 가볍게 하고 갑시다. 이 쪽이 큐브에서 나온 유...선호씨? 맞나?"

"...네, 유선호입니다."

"그래 이 쪽이 우리 회사 마케팅부 대표 미남 황민현씨. 하하, 선호씨는 민현씨 또래같은데, 나이가 몇인가?"

"올해로 스물 하나입니다."

"허, 보기보다 젊은 친구로구만. 난 또..."

"...대충 소개는 된 거 같으니 이만 가봐도 되지 않을까요?"



이대로는 로비에서 떠들고만 있겠다 싶어 민현은 슬쩍 권부장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아, 그렇지 내 정신 좀 봐. 뭐 실상 중요하게 해야될 건 없고, 그냥 안면 트라고 만든 자리니까.

적당히 좋은 대화 좀 나누다가 오면 되겠네. 민현씨가 선호씨한테 인생 충고라도 해준다던지, 하하."



인생 충고는 무슨 얼어죽을.

내 자신도 컨트롤하기 힘든 사람이 누구에게 충고를 한단 말인가.



당장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과 동시에 이대로 가만히 서 있고만 싶은 기분에 휩싸여 민현은 당황한 듯이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민현은 다녀오라며 어깨를 토닥이곤 들어가버린 권부장 쪽을 슬쩍 바라보다 아까부터 외면해왔던, 지금은 자신의 얼굴을

뚫어버리겠다는 식으로 쳐다보는 선호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상 각오를 다지고 바라본 선호는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시선을 피하고 입구쪽으로 걸어나갔다.



"저, 유선호!"



선호가 멀어져가자 급히 부르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 입술만 재차 물어대던 민현을 뭐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 가십니까?"

"...아."

"저 이곳 잘 모르는데 황민현씨가 안내해주시죠."



민현은 다시 눈을 깜빡였다.

처음 본 사람인 양 구는 선호에게 왠지 모를 서운함과 온갖 감정이 느껴졌다.



그래, 우린 이제 비즈니스 관계인 거다.

아무것도, 연결된 그 무엇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고 마음을 추스린 민현은 잠시 대리석 바닥을 한번 쳐다보다 고개를 들고는 미소지었다.



"네, 죄송합니다. 아까 제 소개를 잘 못한 것 같은데, 마케팅 1부 팀장 황민현입니다. 오늘 큐브와의 중요한 미팅에

제가 오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직 아침 안드셨으면 가볍게 브런치라도 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러시죠."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짓는 선호의 옆으로 민현이 큰 보폭으로 다가와 섰다.



"차로 10분쯤 되는데, 제 차 타시죠."

"괜찮습니다. 따로 가겠..."

"이쪽 지리 잘 모르신다면서요."

"그..."



무의식적으로 거부를 하던 선호는 할말이 막히자 입을 꾹 다물고 먼저 가버리겠다는 양 빌딩을 나서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기하급수적으로 쏟아내리는 비에 재빨리 현관으로 올라설 수 밖에 없었다.


무슨 비가 이렇게 온대... 하늘에 구멍 뚫린 거 아냐?


일기예보 따위는 듣지 않는 데다 주위에 무심한 선호였기에 오늘 날씨가 흐리건 말건 아무 생각 없이 나선 것이 문제였다.

어쩌지, 라며 더 거세지는 것 같은 비만 멍하니 바라보던 선호에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비가 많이 오네요. 바짝 붙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에게서 익숙한 향이 난다.

순간 울컥할 뻔한 선호였지만 큼큼거리며 참아내고 빨리 가자며 민현을 재촉했다.


그냥 오늘 일을 잊어버려야 할 것 같아.


민현이 선호를 조수석에 태우고 레스토랑에 갈때까지 선호는 필사적으로 밀려나오는 감정을 참았다.

저 사람은 아무 감정 없는데 자신은 왜 이리 나약한 거냐며 자책하면서.



* * *



결국 그날의 미팅은 민현과 선호 둘다에게 최악이었다.

레스토랑에서 깨작깨작 밥을 먹던 선호나 물만 마셔대던 민현이나 머릿속이 복잡하긴 매한가지였다.

집으로 가는 선호를 태워다 줄 수 없어 우산만 쥐어주고 자신은 차에 몸을 싣고 재환과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요즘 잘 나가는 거 축하할 겸 근사한 데 데려가고 싶었는데 이대로 그런데서 식사를 하기에는 속이 불편했다.

술이나 한잔 하자는 말에 에엑? 하며 놀라던 재환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대학생때의 저는 술과 거리가 멀었으니까.

선호와 이별하고서도 밤에 맥주 한캔하는 것 말고는 딱히 술을 즐기지 않았기에 민현도 기분이 묘했다.



그냥 오늘은 그래야 할 것만 같은 날이니까. 조금은 괜찮겠지.



고깃집으로 들어가 주변을 둘러보던 민현의 시야에 웃음을 가득 달고 손을 붕붕 흔드는 재환이 보였다.

여전히 머리는 부스스하네,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민현은 재환에게 마주 웃어주며 손을 올렸다.



"재환아."

"형- 와, 이게 얼마만이에요? 여전히 멋있으시네요. 더 잘생겨진 거 같은데, 살빠졌죠?"

"어, 조금. 너도 완전 연예인 아냐? 이야- 잘생겼네."

"하하, 아직 멀었죠. 근데 무슨 술이에요? 뭔 일 있나본데?"



...그리고 여전히 예리하다.



민현이 멋쩍게 웃으며 그냥, 하니 재환이 곧 그냥이 아닌데? 라며 받아쳐온다.



"형 그때나 지금이나 거짓말 못하는 거 알죠? 당황하면 눈 깜빡이는 거나 시선 회피하는 거. 크, 여전하네."

"그랬나..."

"아 그렇다니까. 민현이형 그 뭐냐, 또 있잖아. 입술 깨무는 거. 이렇게 막."

"아하하, 내가 언제 그랬어. 그건 진짜 아니다."



민현은 부러 진지한 표정을 하고 과장되게 입술을 분쇄해버릴 듯한 느낌으로 물어대는 재환이 웃기다며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웃었다.



아, 넌 개그맨을 했어야 됐어. 아 형, 개그맨 하기에는 제 비주얼이 좀... 너무 딱 맞는다고? 예? 아까운거죠!!



쉴 틈 없이 투닥이던 둘이 잠시 진정된 건 찌개와 소주 두병이 테이블에 세팅되기 시작했을 때였다.

가만히 한병을 딴 민현이 소주잔을 재환에게 밀며 들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재환에게 조금 따라주고 저도 그만큼 따른 후 건배- 라며 잔을 짠 하고 마시는 민현이 재환의 눈에는 한없이 쓸쓸해보였다.

눈치를 살짝보다 소주를 한모금 마신 재환이 입을 열었다.



"진짜 말 안해줄 거에요?"

"뭘."

"형 오늘 왜이렇게 지쳐있는지. 오늘 미팅 있었다면서요. 그거때문에 그래요?"

"그렇겠지?"

"왜요, 저쪽이 막 꼬장부렸어요? 막, 사장나와!! 이랬다던가."

"에이, 누가 그러냐. 차라리 꼬장부리는 게 낫겠다."



꼬장부리는 게 낫다고?


알쏭달쏭한 민현의 말에 재환이 의문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고민에 빠져있자 민현이 소주만 들이키다 픽 웃곤 말했다.



"선호, 만났어."

"네?"

"상대가 선호더라고."

"그, 뭐, 아니. 유선호요? 꼬맹이?"

"응."



헐 만 반복하는 재환의 손에 들린 소주잔이 곧 떨어질 것만 같아 민현은 잔을 뺏어 테이블 위로 내렸다.

그런건 안중에도 없는 재환의 표정은 쉴틈없이 바뀌는 게 누가보면 저가 전 애인이라도 만난 것 같다.

잠시 패닉에 빠져있던 재환이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헤어졌다면서요. 자세한 건 못 들었는데 왜 헤어진거에요? 걔가 형 싫대요?"

"아니."

"그럼, 형이 걔 싫어해요?"

"그럴리가."

"근데 왜 헤어져요? 뭐야."

"그런게 있어."

"아 뭘 그런게 있어!! 그냥 말해줘요."



방방 뛰는 재환을 보며 소주를 입안에 털어넣던 민현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래서 형 오늘 걔 보니까 어땠어요?"

"그냥..."

"그냥 뭔데요!! 아 답답해."



그냥 조금 여기가 아팠어... 마음 한 구석이.



민현은 뒷말을 몇잔째인지 모를 소주와 함께 삼키며 쓰게 웃었다.



* * *



민현이 축축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오피스텔로 돌아온 건 새벽 두시였다.

내일 출국이라 목만 축이듯 조금 마신 재환과 달리 민현은 무언가 끊어진 양 술을 부어댔다.

옆에서 재환이 이러다 몸상한다며 잔을 뺏고 별 난리를 쳤지만 민현의 애처로운 눈에 다시 쥐어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물에 젖은 솜처럼 늘어져버린 민현을 부축해 뒷자석에 태우고 대리운전을 불러 준 것도 재환이었다.

제 집에서 자고 가라며 이끌었지만 집에 가겠다며 고집부리는 민현에 두손 두발 다 들어버렸다.



사람 몇 없는 새벽 거리를 달리는 차는 막힐 것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민현 혼자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것이었다.



창밖으로는 비가 내리고, 너도 내린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만 같이 마구 퍼붓는다.

내 마음도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아서 마구 널 부었다.



손가락 한마디만큼 창을 열고 손가락을 내밀어 비를 맞았다.

차갑다.

그리움이 빗방울인 양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훅 하고 숨을 내쉬었다.

공기중에 떠도는 알코올 향 사이로 희미한 향수내음이 느껴졌다.

자신의 것인지 재환의 것인지... 아니면 선호의 것인지.

뒷자석에 자신과 같은 모양새로 널부러지듯 놓인 담요를 집어들었다.

아까 선호가 비에 젖어 추위에 떠는 것을 보고 덮으라며 건네줬었던 것 같다.

민현은 담요를 얼굴에 올려놓고 숨을 들이쉬었다.


선호의 향, 약간의 비 냄새, 그리고 눈물 냄새가 났다.

선호가 제 옆에 있는 것 같았다. 육개월 전 그때 그 가로등 아래서 놓지 못해 안고 있었던 것 같았다.






태풍 w.해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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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조절 실패했습니다...('-'

민현이와 선호의 관계정리를 담으려 재환이와의 요소를 뺐습니다만 한편으로 안되네요 흡

다음편에서 결별에 대한 둘의 심경과 재환의 해바라기 사랑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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